"서양인은 부모의 묘도 파헤치는 무모한 무리인가"

도정신문 | 입력 : 2022/12/01 [10:15]

남연군묘.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로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은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지관(地官)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위치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다. 묘지리는 탑이 서 있었지만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무덤이 옮겨지게 되었다.                 사진/예산군

▲ 남연군묘.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로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은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지관(地官)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위치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다. 묘지리는 탑이 서 있었지만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무덤이 옮겨지게 되었다. 사진/예산군



충남도는 1896년 13도제 채택으로 충청도가 충남과 충북으로 분리되면서 개도(開道)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37개 군이 14개 군으로 통폐합됐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도청 소재지가 대전으로 이전하는 변화를 겪었다. 이어 1989년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의 분리 독립 등 행정환경의 급변에 따라 다시 도청 소재지를 내포신도시로 옮기면서 ‘내포시대’를 열었다. 충남도는 국토의 중앙이자 3남의 분기점에 자리한 지정학적 입지 등으로 인해 격동기 굴곡진 근현대사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충남도정신문은 올해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이전 10주년을 맞아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재조명하는 ‘격동의 충남 100년’ 코너를 신설, 충남 역사와 변천사를 소개함으로써 도민들의 애향심 고취와 자긍심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서양인은 부모의 묘도 파헤치는 무모한 무리인가” 1

 

 


오페르트 ‘통상교섭요구’ vs 대원군 ‘거절’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하려다 실패
쇄국정책 명분 강화 천주교 박해 가속화


구한말, 구미열강은 힘없는 조선 왕조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철도 부설이나 광산채굴 등 돈벌이에 군침을 삼켰다. 독일인 오페르트 역시 그런 야심으로 1866년 3월과 8월 두 번이나 조선에 건너와 통상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창 쇄국정책을 밀어붙이던 대원군은 그의 요구를 단숨에 거절해 버렸다. 하지만 오페르트는 단념하지 않고 엉뚱한 방법으로 통상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에 있는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시신과 부장품을 무기로 대원군과 담판을 벌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대원군이 자기 아버지 묘를 이곳에 옮김으로써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자신도 대원군으로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 묘를 건드리는 것이 대원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라 오판했던 것. 그래서 오페르트는 일본으로 건너가 남연군묘를 도굴할 도굴단 모집에 나섰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금이였는데 마침 미국인 젠킨스라는 사람이 자금책으로 포섭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 신부 페롱과 중국, 필리핀과 유럽 등에서 온 인부 등 140명이나 되는 도굴단이 구성되었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도 일부 포섭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 도굴단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은 타고 갈 기선도 마련되었다. 1천톤급 차이나호, 그리고 같은 급수의 그레타호, 이에 필요한 자금 역시 미국인 젠킨스가 제공한 것이다. 

마침내 이들 도굴단은 1868년 5월 10일 저녁 덕산의 구만포에 도착, 닻을 내렸다. 그리고 군대가 행진하듯 일사불란하게 남연군 묘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덕산군청에 쳐들어가 기물을 무단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에 들러 곡괭이 같은 도굴 장비를 빼앗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손쉽게 남연군묘를 발견하고는 모두 달려들어 파헤치기 시작했다. 

처음 묘의 봉분은 쉽게 파헤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가 묘광에 이르자 의외의 벽에 부딪쳤다. 석회를 섞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묘광을 에워싸고 있어 곡괭이로 아무리 찍어도 꿈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묘를 조성할 때 만약의 경우 도굴을 당할 것에 대비하여 몇 겹 석회를 이겨 묘광을 조성했던 것. 

이처럼 도굴단이 땀을 흘리며 씨름을 하는 동안 벌써 동이 틀 시간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바다의 썰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다시 물이 들어올 때까지는 배를 띄울 수가 없는 것. 그래서 이들은 도굴작업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와 구만포로 향했다. 만약 날이 밝아 관헌이 출동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떠났다. 

남은들상여.  /문화재청

▲ 남은들상여. /문화재청


대원군은 그의 아버지 남연군 묘가 오페르트 일당에 의해 도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진노했다. ‘서양 사람은 부모의 묘도 파헤치는 무모한 무리가 아닌가’ 대원군은 그렇게 소리쳤다. 조상숭배, 특히 묘지에 대한 존경심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전국적으로 충격을 주었고 쇄국정책의 명분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아울러 천주교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만큼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대원군에게는 끔찍한 충격이었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묘를 신앙처럼 마음에 모시고 살았다. 대원군은 처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경기도 연천에 모셨는데 충남 예산군(당시는 덕산군) 가야산에 2대에 거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이장을 결심했다. 

마침 그 자리는 가야사라는 절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의 계획이 벽에 부딪칠 뻔 했으나, 여기서 포기할 대원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가신들을 데리고 현지에 내려갔다. 그리고 야간을 이용하여 절에 불을 질렀다. 잠결에 놀라 일어난 스님들이 불을 끄려고 했으나 가신들은 스님들을 위협하여 멀리 쫓아 버렸다. 스님들은 명색이 왕족이어서 꼼짝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일설에는 대원군이 쫓겨 난 스님들을 위해 별도의 절을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하여 1846년 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덕산 가야산의 불태운 절터로 이장하는 작업을 벌인다. 연천에서 덕산까지 196킬로미터 약 500리길, 시신을 운구하는데도 30일이나 걸렸다. 자동차도 없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상여가 마을을 지나려면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가로막는 일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럴 때는 산을 넘어야 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고난을 겪으며 30일이나 걸려 운구해온 상여는 마지막 도착지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이르러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증했는데 지금 국가민속문화재 31호로 지정된 ‘남은들 상여’가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장을 하고 7년 후 대원군은 아들을 낳게 되었고 이아들이 1863년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종이다. 그리고 1895년 그의 손자가 왕위에 오르니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다. 그러니까 가야산 절터에 아버지 산소를 모시면 2대에 거쳐 임금이 탄생하리라는 예언은 맞은 셈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간직한 남연군묘를 서양 사람이 주동이 되어 파헤쳤다는 것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서양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고 그것이 또한 그의 쇄국정책에 뿌리를 박게 했을 것이다. 

결국 오페르트는 남연군 도굴사건으로 그가 살고있는 독일에서도 문제가 되어 사법 당국에 의해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 대법원은 3개월 복역과 함께 그동안 수사와 재판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그의 행위가 반인륜적이었다는 것이다. 자금을 지원한 미국인 젠킨슨, 그리고 프랑스 신부 페롱 역시 자국에 소환되거나 고발당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출처 : 충청남도 홈페이지 도정신문님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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