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자존심, 백제의 후손이 세우다

일본 속 백제이야기 (2) 박재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

도정신문 | 입력 : 2018/03/16 [11:51]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전경
▲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전경


교토의 자존심, 백제의 후손이 세우다 1

교토에 있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는 일본 국내인들은 물론이고 해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교토는 고대부터 근세까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현재 교토에 남아있는 많은 전통시대 유산들은 일본 전체 국보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기요미즈데라이다.

기요미즈데라는 이름 그대로 물이 맑은 사찰로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고 있다. 사찰의 전경은 경탄을 금치 못할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창건 이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정신수양의 도량이 되었고, 극락세계로 통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본당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내 유물 15건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요미즈데라가 백제와 인연이 깊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기요미즈데라는 헤이안(平安) 시대인 780년 사카노우에노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년)에 의해 창건되었다. 다무라마로는 공경(公卿)이자 무관 집안 출신으로 그 뿌리는 백제였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자신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그는 일본 최초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어 동북지방의 에미시(蝦夷)를 토벌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천황가와 외척관계를 맺으면서 고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발해사신과 교류를 가지는 등 정치·외교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다무라마로를 정이대장으로 임명하고 중용한 인물이 바로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桓武)천황이다. 간무천황은 무령왕의 후손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 또한 자신이 백제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면서 많은 백제계 인물들을 우대했다. 백제왕 후예들이 살고 있는 오사카 히라가타의 백제사(百濟寺)로 매년 찾아가 제사를 올리고 수렵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헤이안, 즉 교토 역사의 시작과 함께 교토가 현재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것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기요미즈데라에서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사찰에 깃든 역사적 의미 속에는 백제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멸망한 나라의 후손들이지만 타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이어갔고, 오히려 이러한 모습들이 일본 내에서 위상을 지키고 기반을 더욱 다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 교토의 자존심, 기요미즈데라는 백제라는 뿌리에서 그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충청남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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