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기자가 다녀온 우리 문화재19

사계고택-김장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명예기자 천경준 | 입력 : 2018/05/14 [10:14]

 

김장생 그는 누구인가? 김장생, 그는 조선 1548(명종3년)~1631년(인조9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명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20세 무렵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종친부전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연산으로 한번 낙향하였다가 다시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인이 득세하자 다시 연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익산군수, 회양·철원부사를 맡았다. 그러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후 이괄의 난 때 왕이 공주로 피신해오자 왕을 보필하였고, 난이 진압된 후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한 달여 만에 다시 연산지역으로 돌아와 향리로써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1602년 봄, 그는 북인이 득세하는 정계에 신물이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 연산지역(현재의 계룡)에 지은 집이 지금의 사계고택이다. 김장생은 1631년 8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아들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장 송준길 등 후학을 양성하였다.

 

                                             은농채(사랑채)
 

 1602년 건립한 사계고택은 충남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22-4에 있으며, 계룡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0년 9월 27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11월 11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90호 재지정 받았다. 2,850의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인 은농재(隱農齋), 중문과 사랑채가 달린 안채, 그 뒤로 집안의 조상들을 모신 가묘(家廟)가 일렬로 있는 구조이다. 안채의 왼쪽으로 나가면 별장이 있고 그 앞에는 회화나무를 심은 연못이 잇다. 고택 경내에는 은농재와 안채 외에도 문간채, 광채, 부속채, 별당채, 영당, 행랑채 등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은농재는 고택의 중심에 있으며, 전면 4칸, 측면 2칸의 ‘―’자형 평면에 홀처마 우진각지붕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고 추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는 지붕
을 올렸다. 원래는 초가지붕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기와지붕으로 변경한 상태이며, 건물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대문 옆으로 길게 붙은 문간방은 현재 사계전시관으로 활용 중이어서 김장생의 생애와 관련 유물을 비롯해 그의 스승과 제자들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사계고택 주변에는 왕대산 등산로가 펼쳐져있어 정상에는 김장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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