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기자가 다녀온 우리 문화재 20

신도내 주초석 및 석재(新都內柱礎石 및 石材)

명예기자 유정현 | 입력 : 2018/06/07 [16:52]

 신도내 주초석 및 석재 문화재는 충남 유형문화재 66호(1976. 06. 09)로 조선시대 궁궐·관아 유형유적 건조물이다.


신도(新都)내의 부남리를 비롯하여 정장리, 석계리 일대 약 1만여평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주춧돌들이다. 이곳은 계룡산 남쪽으로 대궐평(大闕坪)이라고 부르는데 계룡산을 북으로 업고 좌우에 산줄기가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해당한다. 고려가 망한 후 1392년 개국한 조선은 474년간 지속되어 온 고려의 사회체제에서 벗어나고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왕도를 새 자리로 옮겨 넓히고자 신도시 지역을 찾다가 새로운 수도로 한양과 함께 계룡산 일대가 거론되었다.


태조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393년 1월에 직접 계룡산 일대의 지세를 살피기 위해 행차하여 2월 8일에 도착하였다. 권중화가 그린 신도에 들어설 종묘·사직·궁전·조시를 만들 지세를 토대로 땅을 측량하고, 계룡산의 신도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신도건설이 착수된 이후 3월 24일에는 계룡산의 신도를 중심으로 81개의 기내(機內)·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를 확정하였다. 계룡산의 신도건설은 1393년 2월에 시작하여 이 곳 대궐평에 자리를 정하여 궁궐을 짓기 시작하면서 석재를 이 곳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갑자기 공사가 중지되고,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하륜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계룡산이 지리적으로 나라의 중앙이 아니고 풍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신도건설 공사는 10개월간 진행되었는데, 공사 중 봄과 가을 농번기에은 잠시 중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제 공사 기간은 그 보다는 짧았으며, 궁궐의 터를 다지고 건물의 주춧돌을 깎는 정도의 공정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의 석재들이 이렇게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석재는 사람의 힘으로는 운반하기 힘든 큰 돌들로서, 당시 가져다 놓았다는 94개중 파손된 2개를 뺀 나머지는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래 석재들이 있던 곳은 원불교 훈련원인 삼동원(三同院)의 정원과 그 건물 주변이었는데 1950년대 말에 이 곳에 삼동원 건물이 들어 오면서 다소 자리가 이동되었다. 그 후 계룡시가 설계되고 삼군본부가 들어오면서 여군숙소인 근화원(槿花園) 주변에 석재를 모아 세 곳에 보관하고 있다. 석재들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부정형(不定形)의 석괴로 주춧돌용의 6면체 석재가 있는가 하면 장대석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기다란 돌들도 있다. 초석용의 석재 중 큰 것은 가로 170cm에 세로 130cm, 높이 100cm, 또는 150cm×120cm×95cm 등이 있고 장대석은 길이 310cm, 폭 80cm, 두께 50cm의 것도 있으나 대개 길이 1.5m~2m 내외가 많다. 신도건설을 위한 도성의 설계도가 있었을 것이지만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시설의 배치계획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대궐평·종루터·동문터· 등의 지명이 남아있으며, 신도건설에 얽힌 각종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전하고 있다.
계룡대 3정문에서 출입조치 후 관람(20명 이상일 경우 사전승인 필요) 할 수 있으며,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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